숭의동지회 역사와 뿌리

 

()숭의동지회 역사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도발한 전쟁의 불구름은 이 땅에 수없이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상상할수 없었던 큰 재앙과 재가루만 남기고 3년간의 전쟁 포화가 일시 멎은 1953년 7월27일 기점으로 북한군에 복무하던 군인들을 중심으로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낀 의거의 숭고한 뜻을 지닌 용사들이 “ 월남귀순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뢰밭인 북방한계선을 넘어 초인간적인 결단으로 불귀의 길을 선택한 반공용사들이 였기에 오직 하나의 일념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기도 전에 북파공작원으로 다시 월북하여 일곱 번이나 죽음의 3.8선을 넘나들며 임무를 수행하고 현재 생존한 이도 있으며 임무를 수행 중 체포되어 자기가 복무하던 부대 앞에서 이슬로 사라진 이들도 수없이 많다.

일부는 국군에 편입되어 군복무를 다시 하였다.

 

미중유의 “남침용 땅굴”발견 등 전쟁수행 상 필요한 군사 1급 기밀을 대북정책 수립과 심리전에 제공하여 국민의 생명재산을 지켰을 뿐 아니라 국가안전과 단결을 훼방하던 종북세력과 맞서 싸웠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안전과 발전의 밑거름의 바탕에는 귀순용사들의 넋이 깔려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전쟁직후에 북한도 그러하였지만 한국 역시 온 사회가 무질서와 기아에서 헤어나기 위해 모든 힘과 노력을 다 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뛰여든 귀순용사들의 생활에도 북에 두고 온 혈육이 겪을 피해의식의 고통과 북한체제와 상반되는 자본주의 체제 적응의 큰 과제가 뼈아픈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안가(국정원)을 나오면서 정부에서 주는 정착금품이 현금 10만원(당시 1년월급) 쌀 혹은 보리24kg 군용모포 2장이 전부였으며 주거지도 없었다.

담당경찰관의 노력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빈 창고, 낡은 닭우리, 남산 지하토굴이 잠자리 였다.

 

안정된 직장도 없었고 동대문 남대문 시장에서 짐을 날라주고 농장, 식당에서 일해주고 일당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술한잔 얻어먹은 저녁이면 남산토굴에서 모여 한탄도 하고 노래도 하며 싸우기도 하면서 자유를 찾은 안도감으로 언 몸을 녹이며 희망을 안고 미래를 바라보며 생활 하였다.

이런 상황은 귀순용사들이 마음의 안정을 위하여 단합을 위한 모임이 필요하다는 일치된 성후배들의 의견에 따라 1960년 2월 귀순용사 한태석(숭의동지회 2대-9대 전회장)님을 단장으로 하는 “멸공의거단”이 창단되어 자기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숭의동지회“의 근간이며 역사의 시작이였다.

당시 회원수는 200명정도 였으며 북파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회원들을 포함하여 모든 성원들이 애착을 가지고 사업을 진행하였다.

 

1961년 5월16일 사변은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해산하라는 지령에 따라 “멸공의거단”도 해산 되었다.

그후 국내정세가 일정하게 완화된 1961년 9월 전국적으로 새롭게 생겨난 단체로서 “한미친선협회” “한영친선협회” 다음 세 번째로 “귀순용사회”가 탄생하였다.

당시 회원들은 북한의 남침위협을 견제하는 사업과 전국 순회강연등 북한의 독재정권을 폭로하는 사업에 앞장섰다.

이런 공로로 1962년 4월16일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보호법”이 제정 되었으며 귀순용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신뢰보호 원칙에서 대각선으로 그어진 붉은 두 줄의 “애국청년층”이 발부 되었다.

 

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당시 한국의 국내 경제사정은 심각한 상태였다.

사선을 넘어온 귀순자들이 설자리가 없었으며 취업도 일정한 주거지도 없는 상태였다.

여전히 주거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귀순자들이 자기 집이 없었으며 여성귀순자들의 경우 담당경찰관이 소속된 경찰관 수직실에서 1년간이나 생활한 경우도 있었다.

 

1969년 12월 탈북귀순자 실태를 파악하던 박정희 대통령께서 “월남귀순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였다.

당시 초청받았던 귀순자는 박명하, 오정열, 박동하(귀순용사회 핵심으로 “숭의동지회”창단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을 통하여 귀순자들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한 박정희 대통령께서 “귀순용사”들에게 집을 주고 본인이 요구하는 직종에 취업시키라는 대통령 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전국의 귀순자들이 자기가 요구하는 직종을 선택하여 은행, 철도, 전력공사, 세관, 등에 취업하게 되었다.

이 때를 월남 귀순자들은 황금기라고 말한다.

 

“박정희”대통령은 1972년 12월 재단법인 “귄순후원회”(북한 이탈주민 후원회, 현재 남북하나재단 전신)을 직접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당시 김현옥 내무부 장관을 겸임 초대하였으며 이사로 타계한 고 “정주영” 현대회장 등 재계인사를 추천하여 “월남귀순자”들이 도움을 받을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후원회 지도부장은 김용철(숭의동지회 10대회장)이였다.

 

대통령의 이런 배려에 힘입어 1974년 8월15일 북의 사주를 받고 조총련이 파견한 문세광에 의하여 육영수 여사께서 피살 되었을 때에는 “귀순용사”250여 명이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에 류창돈(숭의동지회 13-14대 회장)의 자비로 휘발유를 구입하여 대사관 건물에 불을 지르며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굴복한 일본 정부측의 사과를 받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격시위 투쟁의 책임을 지고 류창돈 회장 외 2명은 서대문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체는 더욱 단합되었고 모든 귀순용사들이 애착을 가지고 단체를 신뢰하게 되므로 1980년 10월1일 단체를 “숭의동지회”로 명변하고 회칙을 통과하였으며 홍순원씨 “숭의동지회” 초대회장으로 하는 단합의 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단체는 홍순원(초대) 한태석(2-9 연임) 염동렬(3대) 조규홍(4대) 이경빈(5-6연임) 정형준(7대) 오손석(8대) 김용철(10대) 이준기 (11대) 김주석(12대) 류창돈(13-14연임) 한일성 (15-16연임) 유인덕 (17대) 회장으로 이르는 기간 단체의 최종목적은 민족의 오랜 숙원인 조국통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우리가 이루자는 구호밑에 그증하는 회원들의 정착지원에 헌신하고 있다.

 

2000년대를 맞으며 착취와 압박, 천대와 멸시, 굶주림과 허덕임의 “죽음의 땅” 노예의 땅을 탈북하여 목숨을 걸고 사선을 헤치고 자유를 찾아오는 회원수가 더욱 급증하는 것과 관련하여 “숭의동지회”가 해야할 과제들과 잠재된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단순한 관병단체에서 탈피하여 더욱 과감하게 통일의 그날까지 법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일치된 의견에 따라 2006년 11월 사단법인 단체로 거듭났으며 정관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단체를 중심으로 통일의 길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라는 것을 명심하고 더욱 단합하여 통일된 강토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분단의 아픈상처를 하루빨리 치유하는 그날까지 어려움을 극복하여 새로운 꿈을 안고 힘차게 나가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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